세계를 뒤흔든 그림 한 점
2014년 9월, 한 그림이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중동 카타르 왕족이 2100억 원을 지불하며 구매한 작품,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When Will you Marry'였습니다. 고갱은 생전에는 외면받았지만, 죽음으로써 불멸의 예술가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가격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타히티 원주민 여성들을 남성중심적 시선으로 성적 대상화한 고갱의 족적은 오늘날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독해되기 때문입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예술가
1848년 프랑스는 혁명의 열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폴 고갱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급진적 성향의 언론인이었고, 외가에도 사회주의 운동가의 피가 흘렀습니다. 어린 시절, 고갱은 외가 댁이 있는 페루 리마에서 생활하며 원주민 하인과 노예가 딸린 저택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동시에 거친 삶을 살아가는 농부와 상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죠. 이러한 경험은 그의 평생의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방황하다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오면서 '페루의 야만인'이라 불리며 조롱받았습니다. '문명' 프랑스는 그를 모질게 대했고, 고갱은 너그러운 페루를 그리워했습니다. 이방이 고향이 되고, 고향이 이방이 된 역설 속에서 고갱의 마음속엔 원시를 향한 애정이 싹텄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상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를 유랑한 것 역시 이 같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그에게 프랑스는 억압이었고, 원시의 세계는 자유였으니까.
증권 중개인에서 화가로의 변신
성인이 된 고갱은 증권 중개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탁월한 능력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덴마크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붓을 쥘 때도 그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주식 시장이 마감하면,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붓의 매력에 빠진 고갱은 돈이 덧없이 느껴졌고, 1881년에는 인상파 전시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고립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화풍
1884년, 주식 시장의 폭락으로 고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붓질로 먹고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술계의 우군까지 잃고, 고립되어 갔습니다. 기존 인상파와 다른 자신만의 화풍인 '쿨루아조니즘'을 구축하며, 굵은 윤곽선과 단순한 색상으로 대상의 본질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타히티, 욕망과 예술의 섬
고갱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며 문명 이전의 삶을 갈망했습니다. 이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타히티관'을 접한 후, 1891년 타히티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유럽의 색으로 오염되지 않은 마을에서 현지 소녀들과 관계를 맺으며 수많은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감각은 성적으로, 예술적으로 깨어났고, '타히티의 여인들', '해변에서' 등의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돌아온 고갱, 그리고 비극의 시작
1893년, 고갱은 돈을 벌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타히티 작품에 대한 평가는 냉담했고, 그는 변태적 중년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성병, 다리 종기, 어린 동거인과의 삶 속에서 고갱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1895년, 그는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 14세 소녀 파푸라를 동거인으로 들였습니다. 파푸라가 아들을 출산한 해, 그는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습니다.
타히티에서의 죽음, 그리고 불멸의 예술가
타히티가 프랑스화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고갱은 더 깊은 섬으로 떠났습니다. 14세 소녀를 아내로 삼고 '기쁨의 집'을 지었지만, 식민 당국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원주민 여성을 향한 지독한 성적 욕구가 그를 집어삼켰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욕망은 예술로 꽃피었습니다. 생전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사후 고갱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고갱, 욕망과 예술의 경계에서 피어난 불멸의 꽃
폴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했지만,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며 타히티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타히티 소녀들과의 관계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지만,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며, 욕망과 예술의 경계에서 피어난 불멸의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고갱은 왜 타히티로 갔나요?
A.고갱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적인 삶과 예술적 영감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갔습니다. 그는 유럽 사회의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하고자 했습니다.
Q.고갱의 작품은 왜 논란이 되나요?
A.고갱의 작품은 타히티 원주민 소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예술적 가치와 함께 윤리적인 문제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Q.고갱은 생전에 성공했나요?
A.아니요, 고갱은 생전에 자신의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예술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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